
나는 아직도 중국 칭다오에서 힐튼호텔 조식을 먹고 있다
01 여행은 떠나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다
여행이 떠나는 순간에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면, 이번 여행은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모든 해외여행이 그러하듯이 이번 여행도 대한민국 인천공항을 경유해야 한다. 동선은 벌써 길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머리 스톱이다.
생각하지 않는다.
2박 3일 1시간 40분 비행하는 해외여행이란, 머리 스톱 시간으로는 딱 좋다.
벌써 중국 청도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다시 켠다.

02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여행지라 부른다
5·4 광장은 바다에 닿아 있다.
5·4운동이 터져 나오기 직전, 중국의 정신적 풍경은 "아큐정전"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정체 그 자체다. 분노는 있었지만 언어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문제의식은 존재했지만 그것을 말로 묶어낼 형식이 없었다. 이 시기의 글을 쓰던 루쉰은 바로 그 상태를 응시했다. 그는 사람들이 왜 침묵했는지를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았고, 왜 행동하지 않았는지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습관, 체념,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감각, 깨어 있으면서도 잠든 듯한 몽롱한 의식 등을 "아큐정전" 문장 속에 그대로 남겼다. 5·4운동은 갑작스러운 폭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5.4운동 직전의 중국의 정신적 풍경이 아큐를 닮아서다.
5.4 광장 벤치에 앉아 루쉰을 생각한다.

03 도시는 반복해서 볼 때, 좋다
99층 해천전망대에 섰다. 도시는 99층의 사방에서 완벽한 대조의 질서를 드러낸다.
구도시는 식민지의 역사를 품은 채 엎드려 있다.
신도시의 도로는 선으로 정리되고, 건물은 높이로 경쟁한다.
그리고 그 사이를 바다가 가른다.
신도시는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배열하고 통제해 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자리다.
그런데 그 질서의 끝자락 멀리 노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99층이라는 숫자는 중국에서 무한을 뜻한다. 무한의 높이에서 딱 보이는 것이 노자의 산이라니, 아이러니하다.
노자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더 높이’가 아니라 ‘이미 그러함’이다.
오름은 성취의 방식이지만, 머묾은 존재의 상태다.
노자의 산 노산을 99층 높이에서 내려다보아야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경로라는 것,
산다는 것은 이렇게 흐뭇하다.
99층 해천전망대를 떠나야 할 때, 다시 노자의 산을 보았다.
여행자의 도시는 반복해서 볼 때 좋다는데,
거기에 노자의 산이 보여서 다행이다.

04 편안함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다
"팔대관"은 청도에서 산책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 한다. "히말라야 삼나무가 늘어선 길이어서,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가진 꽃들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백일홍과 작약, 모란이 이어지는 풍경은 일부러 꾸민 정원이라기보다, 도시에 스며든 자연에 가깝다."라는 길은 겨울이라 어디쯤인지 알지 못한다. 팔대관이라는 이름은 여덟 개의 큰 길이 교차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걷다가 방향을 바꾸면 풍경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이라 방향을 바꾸어도 꽃은 없다.
팔대관의 또 다른 매력은 길을 따라 마주치는 건축물들에 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스페인, 일본 등 약 24개국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200여 채의 건물들은 이곳을 단순한 산책로가 아닌, 하나의 살아 있는 풍경으로 만든다. 특정 국가를 떠올릴 만한 건축 지식은 없으므로 건축을 악보처럼 리듬처리한다. 서로 다른 양식들이 조용히 공존하고 있다. 팔대관을 걷다 보면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청도는 리듬의 도시다. 도시에서 여유로운 리듬을 얻는 일이란 기적 같은데, 리듬으로 편안한 이 기운을 무어라고 할까? 편안함을 그 자체가 풍경이다.

05 가장 강렬한 경험은 이해를 거부한다
칭다오가 ‘맥주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1903년 독일인들에 의해 시작된 양조 역사는 단순히 하나의 브랜드를 만든 사건이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한 계기였다. 바다와 가까운 기후, 부드러운 좋은 물, 그리고 항구 도시 특유의 개방성은 맥주라는 음료를 일상의 일부로 정착시켰다. 칭다오에서는 맥주가 특별한 날을 위한 술이 아니라, 저녁 산책 뒤에 자연스럽게 곁들이는 생활의 온도에 가깝다.
이 도시의 맥주는 박물관에 전시된 역사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거리 곳곳의 비어 스트리트, 여름이면 열리는 국제 맥주축제, 그리고 식사와 함께 당연하듯 올라오는 한 잔의 맥주까지—칭다오에서는 맥주가 풍경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마시는 맥주는 맛을 평가하기 전에 경험으로 남는다. 바다의 습도, 저녁 공기의 온기, 사람들의 느슨한 대화가 함께 섞이며, 맥주는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일상적인 방식이 된다. 칭다오가 맥주의 도시로 불리는 이유는, 그 술이 도시의 리듬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칭다오 맥주 박물관은 두 잔의 맥주를 준다. 한잔은 거칠고 한잔은 달달하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지만
칭다오에서는 맥주를 두 잔이나 마신다.
칭다오 맧주 박물관에서는 두잔이 아니라 스무 잔도 공짜다.
맥주 제공하는 곳에는 정사각형 실내 광장인데
앉아 술마시는 사람들 보면서 뺑 돌아 줄 서면 또 한 잔 준다.
앞사람과 닿을 듯, 뒷 사람과 아예 닿아서 걷는데
누가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행자는 실내 광장을 빙빙 돌고
너무 많이 빙빙 도느라
칭다오 맥주는 마시지 않고도 취한다.
.png)
06 이해하지 못한 순간이, 여행을 깊게 만든다
청도 골든 비치 힐튼의 조식은 뜻밖이었다. 호텔 조식이란 거기서 거기인 것인데, 중국 청도 힐튼호텔 조식은 다르다.
메뉴가 다양한데, 다 맛있다.
이 다름의 경험은 아침이라는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청도 골든 비치 힐튼의 조식은 호텔이 제공하는 서비스라기보다, 하루의 리듬을 천천히 열어 주는 장치에 가깝다.
다 계산된 것이겠지만 여행지로의 출발이 11시였다.
‘서둘러 먹는 식사’가 아니라 ‘머물 수 있는 아침’이 청도 골든 비치 힐튼의 조식과 함께 제공된 셈이다.
즉석 요리인 만두가 맛있다.
작은 만두 먹다가 맛있어서 큰만두도 가져왔는데 역시 맛있다.
누구였더라,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을 물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이제야 답할 수 있겠다.
현지에서는 칭다오 맥주 박물관 맥주였는데
서울에 돌아오니 청도 골든 비치 힐튼의 조식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아침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청도 골든 비치 힐튼의 조식이다. 나는 아직도
중국 청도 힐튼호텔 조식을 먹고 있다. 끝




